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문단 편집) ==== 초기 접촉 ====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에 가는 것이다. 만약 안된다면 우리 아이들이라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 >1970년 10월, 타임지와 인터뷰할 때 닉슨의 발언. 1970년 10월 24일, [[UN]] 창립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 참여했던 파키스탄의 칸 대통령은 다음날 닉슨의 초청을 받아 한시간 동안 닉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닉슨은 곧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칸에게 중국 측에 미국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할 계획이 있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11월 9일 베이징을 방문한 칸 대통령은 닉슨의 요구대로 미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키신저는 파키스탄을 중재로 하는 당시 미중접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때의 메시지 교환은 20여년 이래 두 나라 사이에 교환된 최초의 진지하고도 솔직한 것이었다. 미국 측의 메시지가 극도로 모호했던 데 반하여, 중국 측의 메시지는 극도로 애매하였다. 미국측 각서를 초안한 나로서 중국 측의 답신을 처음 대했을 때 소련과 중국의 외교 의사 통신의 차이가 큰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국이 소련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스타일과 발상에 있어서도 보다 더 섬세하였다." 1970년 12월, 저우언라이는 "타이완이라고 부르는 중국 영토에서 휴가를 주제로 토론하기 위해" 워싱턴 특사를 베이징에 초청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했고 키신저는 "베이징에서의 회담은 단지 타이완 문제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1970년 12월,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 미국의 언론인.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 옌안의 중국공산당을 찾아가서 마오쩌뚱을 포함해서 주요 고위 간부들을 인터뷰한 후에 대장정을 다룬 <[[중국의 붉은 별]]>을 저술하였다.]를 초청해 아침식사를 하며 "중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편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존중과 평등이 존재할 뿐."이라고 발언했다. 마오쩌둥은 미국 국민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갖고 있으며 자신과 닉슨이 대화를 나누면 기쁠 것이라고 하였다. 1970년 12월 25일자 [[인민일보]]는 마오쩌둥이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서 에드거 스노우와 같이 [[천안문]] 연단에서 찍은 사진을 게재하며 마오쩌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했다. >"미국 인민을 포함한 전 세계 인민이 우리의 친구들이다."[* 사실 이때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가 CIA의 정보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미국에 전하기 위해서 한 의도적인 발언이었지만, 에드거 스노우는 CIA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당연히 마오의 발언은 CIA나 미국 정부에 전달되지 않았으며 마오쩌둥의 발언은 1971년 4월에 이미 핑퐁외교를 통해 중미접촉이 상당히 진전된 후에야 공개되었다.] ||[[파일:스노와모택동.jpg]]|| || 에드거 스노우와 마오쩌둥, 옆에 [[린뱌오]]도 있다. || 파키스탄을 사이에 둔 미중접촉은 1971년 2월, 미국이 [[라오스]]를 폭격함에 따라 단절되었으나 2월 25일 닉슨이 의회에 외교 교서를 제출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하며 중국과의 대화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3월 5일 마오쩌둥은 "소련이 위협 세력으로 대두되는데 반해, 미국은 아시아 문제에서 철수하는 추세에 있다."고 교시하며 저우언라이를 하노이에 파견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며 저우언라이는 서방측 외교관들과 만나 "중국은 미국 지도자들과 고위급 대화를 갖기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공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